스스로 재구성되는 회화


회화면에서 중력은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화면 안에서 삼차원 공간의 질서를 조직하는 가상적 힘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물감 발린 캔버스와 화가의 신체에 작용하는 실제적 힘으로 드러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간에 중력은 회화의 광학적 평면에 내재하는 힘이 아니다. 회화면을 순수하게 색채들의 평면으로 접근한다면 거기에는 중력이 작용할 여지가 없다. 따라서 화면 안에서 중력이 느껴진다면 그것은 어떤 이유로든 화가가 중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그것을 의도적으로 도입하거나 또는 적어도 방조한 것이다. 정수정의 전작들을 보면, 그는 여태까지 중력을 굳이 회화면 안으로 가지고 올 필요를 못 느꼈던 것 같다. 그의 구상 회화는 삼차원 세계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이차원의 평면에서 스스로 원하는 세계를 불러일으키는 것에 가까웠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무중력적 감각으로 충전되어 있었다. 이전 개인전 <Sweet Siren>(레인보우큐브 갤러리, 2018)과 <A Homing Fish>(갤러리 밈, 2019)에서 정수정은 식별 가능한 객체를 구성하는 색면과 윤곽선을 종종 의도적으로 어긋나게 배치하거나 일부 누락하면서 그것들이 오로지 붓질의 결과임을 명시적으로 드러냈다. 그렇지만 화면은 너덜너덜하게 무너지지 않고 치밀하게 조직되면서 포동포동한 몸체들이 뛰어노는 자유로운 가상세계로 성립했다. 여성형으로 보이는 인간 형상의 몸체들은 두께 없는 표면과 확실히 구별되는 입체감과 운동감을 전달했다. 이들은 투시도법에 의해 규정된 별도의 바닥면에 놓이는 것이 아니라 회화면의 모든 곳에서 스스로 원하는 대로 올록볼록하게 솟아났다. 물감의 유체성 속에서 동물과 식물, 배경과 전경의 경계를 손쉽게 넘나드는 이 말랑말랑한 존재들은 캔버스라는 지지체 위에 편안하게 기대어 있었다. 외부의 힘으로 간단히 밀고 당길 수 없는 물체의 고유한 질량감을 과시하면서, 이들의 팔과 다리, 머리와 엉덩이는 멋대로 움직이거나 고집스럽게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서 회화면은 이들의 자세를 통해 위아래의 방향을 획득했지만 거기에 중력의 감각은 희박했다. 그런데 이번 전시 <빌런들의 별>은 중력에 맞서 날아오르는 것들의 이미지들로 넘쳐난다. 정수정은 그저 예전과 좀 다른 것을 그려 보고 싶었다고 말한다.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드로잉 작업을 보면 로켓과 비행기의 이미지가 전면에 등장하면서 SF 장르에 기반한 환상세계가 구체적으로 그려지는 것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그래픽 노블 또는 일련의 서사적인 회화 연작으로 완성되지는 않는다. 마치 시공간의 질서가 깨져버린 것처럼 각각의 회화는 단편적인 동시에 중층적인 상태로 진동한다. 일례로 <No graffiti here>를 보자. 착륙 또는 추락한 것 같은 비행접시가 있고, 그 위에 물감을 칠하는 한 인물이 있고, 그의 발치에 쓰러진 또 다른 인물이 있으며, 각종 비행기와 화구들이 이들을 에워싸고 있다. 여기서 아무데나 물감을 칠하고 다니는 파괴자-화가의 이야기를 상상하기는 쉽다. 하지만 회화면 내부의 인물이 스스로 붓을 쥐고 있는 까닭에 화면 바깥에 있는 사람이 그의 이야기를 하나로 결정하기는 어렵다. 붓을 쥔 인물은 비행접시를 탈취하고 그 위에 낙서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애초에 그런 것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회화의 세계에 비행 장치의 이미지를 그려 넣으면서 원래의 목가적인 풍경을 망치고 있는 것일까? 화가의 붓질로 그려진 것과 파괴된 것은 어떤 기준으로 구별될 수 있을까? 여러 가지 가능한 이야기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자신이 구축한 회화의 세계를 벗어나려는 화가는 말하자면 그 세계의 중력을 탈출하기 위해 우주를 넘나드는 비행 장치 또는 회화면을 넘나드는 화가의 이미지를 꿈꾼다. 하지만 회화면에서 날아오른다는 것은 주어진 평면과 충돌하여 그것을 부수고 나가거나 또는 스스로 부서지는 파괴적인 과정으로 밝혀진다. 화가는 분열하고 비행기는 두 동강이 나고 해골은 네 조각으로 깨어지고 화면은 조각조각 갈라진다. 결과적으로 화면을 지배하는 것은 SF적인 비행 장치보다도 어떤 공 같은 것, 무언가 빠르게 던져지고 때리고 터지고 추락하고 부수는 운동체 또는 에너지 덩어리의 이미지다. 예를 들어 두 개의 캔버스가 하나의 화면을 이루는 <Fly>의 한가운데 던져진 하얗고 둥근 것이 있다. 확실히 그것은 힘의 작용점처럼 보이지만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기 어렵다. 다만 그것이 거기 던져진 충격으로 화면의 나머지 요소들이 모두 움직였다는 것은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화면의 모든 요소들은 일종의 운동체로서 그 공 같은 것과 조금씩 상동성이 있다. 데굴데굴 구르는 감귤과 반으로 갈라진 수박, 민들레의 솜털 달린 씨앗, 나비와 잠자리가 그려진 종이 조각 같은 것들, 그리고 바닥에 곤두박질치는 인물은 모두 비행체로서 불완전한 몸을 가졌지만 충격파를 타고 일시적으로 떠오른다. 공 또는 원반 같은 형상은 다른 회화면에도 반복해서 등장한다. 폭발의 섬광 같기도 하고 반짝이는 눈 또는 스크린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쉽게 생각하면 그냥 ‘구멍’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구멍을 뚫는 힘이 집중되는 초점인 동시에 그렇게 뚫린 구멍으로부터 파괴적인 힘이 확산되는 폭심점을 표시한다. 소실점이나 중력의 중심점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평평한 화면에 불균등한 힘의 장을 조성하는 이 역동적인 점은 어떻게 보면 단지 화가의 붓이 캔버스를 누르면서 만들어내는 커다란 물감 얼룩이기도 하다. 화면 속 세계의 창조자이자 그 세계의 외부자인 화가가 스스로 만든 세계에 붓으로 쑤시고 들어온다. 이 세계에서 붓은 강력하고 거의 절대적인 무기지만, 그가 붓으로 만들어내는 객체들도 수동적인 물감 얼룩에만 그치지는 않기에 필연적으로 힘의 충돌이 발생한다. 그 결과는 일종의 액션 페인팅이다. 다만 화가는 순전히 물리적인 차원에서 붓과 물감으로 캔버스와 씨름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조성한 가상의 평면에 들어가서 싸운다. 각각의 회화는 계획되고 연출된 장면을 구현한다는 점에서 화가의 영웅적인 투쟁을 이상적으로 재현하는 역사화적 성격도 있지만, 그 투쟁은 화가의 눈과 붓을 통해 실시간으로 일어나는 광학적이고 물질적인 과정으로서 회화면 내에 뚜렷한 흔적을 남긴다. 밑그림의 질서에 속박되지 않는 덧칠, 물감의 흩뿌림과 흘러내림은 본래 명확한 형상을 내포하지 않는 회화적인 것 고유의 무정형성을 드러낸다. 특히 이번 신작들은 전작들과 달리 묽게 흘러내리는 물감의 반투명한 흔적들이 만화적으로 구성된 장면들에 문자 그대로 얼룩을 남기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물감 얼룩은 선적인 구성을 무효화하는 것이 아니라 회화면으로 전달되는 이야기—자신이 만든 세계와 싸우는 화가의 이야기—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요소로 작용한다. 정수정의 회화 작업에서 일관되게 관철되는 명제가 있다면 그것은 회화적인 것의 힘이 그 순수성보다도 오히려 혼성성을 통해 극대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회화면에 가장 회화적인 것만 남겨서 응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회화면을 팽창시켜서 원래 거기에 속하지 않는 온갖 것들을 집어삼키고 소화시키려는, 그럼으로써 실제와 가상, 평면과 입체, 순간과 지속의 어느 한쪽에 한정되지 않는 제3의 세계를 만들어내려는 화가의 야심이 있다. 전시 전체의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며 실제로 가장 마지막에 완성된 작업인 <Our Starman>은 정수정이 이번 모험의 끝에서 마주한 새로운 지평을 암시한다. 화가와 그가 창조한 세계가 충돌하면서 생겨난 화가의 분신들, 세계의 파편들, 또는 그 부서지는 세계와 함께 출현한 새로운 힘의 화신들이 한 회화면에 집중된다. 여기서 둥근 원반의 형상은 회화면을 넘어서는 크기로 확대되어 마치 일그러진 지평선처럼 나타난다. 물감 얼룩은 사방으로 튀고 위아래로 쏟아져 내리면서 그 넘치는 에너지로 기묘하게 휘어진 공간감을 유발한다. 그것은 알 수 없는 또 다른 세계의 입구이자 변신의 공간으로서 회화적인 꿈의 잠재적 영토를 표상한다. 원칙적으로 화가는 무엇이든 그릴 수 있고 그럼으로써 스스로 그린 세계의 왕이 된다. 그렇다면 이 왕은 자신이 아직 그려 보지 못한 미지의 영토를 어떻게 지도 그릴 수 있을까? 정수정은 자신이 만든 세계를 부수고 다시 세우면서 그 세계를 넓혀갈 수 있는 여지를 찾는다. 또한 그것은 화가 자신이 번데기를 찢고 나오듯이 반복해서 다시 태어나는 여정이기도 하다.


/ 윤원화 시각문화 연구자. 

저서로 『그림 창문 거울: 미술 전시장의 사진들』, 『1002번째 밤: 2010년대 서울의 미술들』, 역서로 『광학적 미디어』, 『기록시스템 1800/1900』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