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 없는 그림, 2023


비막(patagium)은 날개가 없는 동물이나 날개가 짧은 동물이 더 큰 저항을 이용해 공중에 체공할 수 있도록 발달시킨 신체 조직이다. 동물의 진화 과정에서 비막은 뭍짐승이 비행과 비슷한 행동을 반복해 스스로를 변형한 결과 탄생했다. 동물의 다리 인근에서 자라난 이 기관은 새로운 생태에 적응하려는 생물체의 역동성을 상징하는 증거다. 비막은 진화의 물리적 성과인 동시에 역설적으로 진화의 중단, 쇠퇴, 실패와 불필요를 드러낸다. 뭍짐승이 깃털을 가진 완전한 날짐승으로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막을 가진 동물은 대체로 특수한 혼종의 지위에 놓인다. 지면의 감각에 의지해 생존하기로 결정한 개별 개체의 의지는 궁극적으로 특정 종 전체의 운명에 영향을 끼쳤다. 보편의 진화가 종적이고 역사적인 현상이라면 비막은 개체성을 횡단하는 부유물에 가까운 것일지 모른다. 전시로서의 《비막》 역시 그러한 점에 착안하는 회화의 유전 형질을 보여준다. 혼종성에 대한 관심은 정수정과 이재석의 작업을 공통적으로 관통해온 주제다. 정수정의 첫 개인전 《Sweet Siren》(2018)이 제목으로부터 암시하듯, 그는 반인반신, 요정(혹은 요괴), 유령이나 정령을 지시하는 신화적 도상을 그려 왔다. 정수정에게 혼종은 환상의 환경과 현실의 환경, 문명 또는 문화의 것으로 유추되는 환경과 자연의 환경을 어딘가 미묘하게 흐트러뜨린 채 뒤섞어 교배한 돌연변이다. 이를테면 그는 신화의 배경 속에 난데없이 현대의 무기를 등장시키거나 연대를 추론하기 힘든 유물과 화석을 고전 도상과 함께 병치하고, 양식의 측면에서는 여러 종류의 회화적 아방가르드, 만화나 애니메이션에 가까운 분할을 적용해 시각적 혼란을 유발한다. 그의 작업에서 가로로 반복되는 구성, 컷과 컷을 이루는 캔버스의 배열로 조직된 이야기 구조는 아날로그 필름의 펼침면이나 포토프레스코를 연상시키는 장치였다. 그러나 이 설명은 그의 화면 전반에 흐르는 불온함을 온전히 전달하기엔 어딘가 불충분하다. 정수정의 회화를 지지하는 감각은 이 형상들이 작가 자신에게 잠재된 것으로서, 화가라는 장치를 통과해 수수께끼의 도상 묶음으로 출현하는 순간 진면목을 드러낸다. 때로 무의식이라 번역되는 ‘화가라는 장치’는 정수정에게 주로 트로니(Tronie)와 같은 초상화 양식의 변주로 표현되었다. 〈Flash〉와 〈Scorpio〉는 이 도상 묶음의 출현을 서사의 출현 형식에 가깝게 끌어당기면서, 이야기의 부조리와 오류를 가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거친 스트로크와 그라데이션을 동원한다. 대부분 뜨겁게 고양된 정수정의 형상에는 화가의 분열적인 자아가 고스란히 투사되어 있다. 그가 창조한 생물은 언제나 대담하게 화면 너머를 의식하고, 화가 자신이 바로 그 변이의 자리에 놓일 때 발생하는 극적인 흥분을 야기한다. 반면 이재석의 화면을 지배하는 정서는 차가운 스크린처럼 무심하게 침체되어 있다. 강박적으로 균질함에 공을 들이는 그의 회화는 화면 뒤에서 옅은 빛이 새어나는 대형 전광판을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 효과는 마치 배채법이 구사된 한국화처럼 물감을 쌓는다기보다 얇게 펴발라 천에 먹임으로써 만들어졌다. 가마 안에서 유약이 도자 표면에 녹아들어 스미듯 물감이 캔버스에 스미기 위해 강도 높은 질서와 통제가 필요하다. 《비막》에서 이재석은 과슈를 이용해 별자리를 그렸다. 별자리 도상의 사용은 그가 한동안 시간을 보낸 수도권 외곽 레지던시의 경험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이는데, 몇 백만 광년의 허공을 가로질러 지구의 어느 시점으로 압축된 임의의 선형을 그려내는 것만큼 그가 천착해온 기법을 간결하고 드라마틱하게 요약하는 소재가 있을까 싶다. 이재석이 즐겨 쓰는 아크릴에 비해 과슈는 보다 선연하게 자신의 흔적을 종이 표면 위에 남긴다. 그래서 그의 새로운 작업은 이것이 종이이고 색이 발린 면적이고 흰 빛을 띤 안료를 가미해 제조한 공허라는 사실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는다. 과슈가 역사적으로 대중 인쇄물의 삽화를 그리는 데 이용되었다는 점에서 이 연작은 판화 양식을 활용한 정수정의 실험에 응답하며, 작가의 관심이 그래픽적인 결과의 통제에서 재료를 다루는 시간과 밀도의 양상으로 전환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깊이를 잃고 그리드에 붙잡혀 방황하는 객체, 그리고 그와 반쯤 융합해 밀착한 생물의 육체는 이재석의 회화를 언뜻 세계 너머의 초현실적인 풍광으로 간주하도록 만든다. 그럼에도 그 감각은 온전히 작가의 신체를 경유해 첨예하게 지각된 산물이다. 여기서 이재석은 정수정이 그렇듯 특수한 회화 장치로 거듭난다. 살아있는 것은 모두 무언가가 되려 한다. 되려 한다는 것은 목적의 여하나 달성과 무관히 살아있는 것이 점유하는 시공의 결과다. 다르게 적는다면, 살아있는 게 무언가가 되는 일은 불가피하다. 이때 혼종은 진화의 단면과 단면 사이에서 불가항력적으로 파생하는 음산한 그림자다. 회화라는 종의 차원에서는 어떨까? 《비막》은 매체의 도약이 멈춘 곳으로부터 중단과 쇠퇴, 실패와 불필요를 상상한다. 회화는 여전히 회화이고 회화가 아닌 것이 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 윤율리, 일민미술관 책임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