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have no power here [1]
최대진, 정수정 2인전
“여기까진 괜찮아, 여기까진 괜찮아, 여기까진 괜찮아… 우리는 추락하지 않고 착륙할 거니까.” [2] ‘우레탄폼’이라는 물건이 있다. 집을 짓거나 수리할 때 틈새나 구멍을 메우는 데 쓰는 제품이다. 스프레이 형태로 되어 있는데 몇분 정도 세게 흔든 뒤 마개를 열고 꼭지를 누르면 누런 거품의 찐득한 액체가 강렬하게 분사된다. 거품이 어디로 튈지, 거품의 양이 얼마나 나올지 처음에는 조절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처음 사용할 때는 자신이 원하는 곳에 제대로 사용하는 데 실패하기 일쑤이고 다 분사가 되면 찔금 찔금 거품이 나오다가 고체로 딱딱하게 굳어버린다. 그닥 상큼하지 않은 그 누런 색깔의 거품 고체를 보며 인간의 몸과 그 몸이 살아내는 삶과 죽음을 생각한다. 누군가에게 눌려진 우레탄폼의 꼭지처럼 그 어떤 생명도 ‘난 이번에 꼭 태어나야겠어’라는 마음가짐으로 삶을 시작하지 않는다. 부모가 나를 낳았고, 어느 정도 키워준다. 이건 내가 원한 삶이 아니다. 방향을 잃기 시작한다. 아무렇게나 막 산다. 종교를 믿든 말든 이번 생은 한번 뿐이다. 결국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그런 자신의 삶을 실패하고 싶지 않아서 모험을 떠난다. 모험을 떠나기 위해서는 심장과 뇌와 용기가 필요하다. 오즈의 마법사의 세 인물인 양철나무꾼, 허수아비, 사자는 각각 이 세 가지가 부족한 이상한(queer) 존재들이다. 결국 이상함이란 신비 / Mystery가 아니라 부재 / Absence에서 출발한다. 우린 모두 이상하다. 예술가도 이상하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약자 / No power이다. 이번 전시에서 최대진과 정수정의 작업에는 미성숙하거나 무언가 부재한 생명들이 다수 나온다. 소년, 소녀, 부랑자, 여러 형태의 소수자들, 혹은 신체의 일부가 불편한 이들, 야생 동물, 출처를 알 수 없는 이상한 생명체 등등 많은 존재들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두 예술가는 사춘기나 십 대 혹은 동물과 같은 약하고 순수한 존재들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조금도 숨기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러한 존재들을 보여주는 두 작가의 방식은 서로 조금 다르다. 최대진은 현실을 응시하며 자신과 인간의 모순과 운명을 파헤치고, 정수정은 어디로 닿을지 모를 환상을 쫓아 앞으로 계속 달려나간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우레탄폼의 거품과 캔사스의 외딴 시골집에서 도로시가 맞이한 회오리 바람이 인도한 세계는 이러한 생명들이 몰랐거나 원치 않았던 세상이다. 많은 것이 부재한 이상한 이들이 용기를 얻고 이 모험을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서로 친해지고 대화해야 한다. 최대진과 정수정이 만든 이 존재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연대하고 소통한다. 그래야 부재와 고독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으니까. ‘무지개 너머 어딘가’에 도착하기 위해 가야할 길은 너무나 멀고 험난하다. 심지어 거기에 이르러봤자 아무것도 없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우리의 마음속을 떠나지 않는다. <멀홀랜드 드라이브>[3]의 마지막 장면에서처럼 오페라 가수가 노래하는 침묵 / Silencio과도 같은 끝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침묵과도 같은 끝이 또 다른 시작이 될 이 영화에서는 이들의 환상과 현실을 이어줄 파란 열쇠가 등장한다. 그렇다면 정수정의 환상과 최대진의 현실이 충돌하는 이 2인전에서 그들을 잇는 파란 열쇠는 어디에 있을까? 조금은 뻔한 얘기일 수 있겠지만 이 전시를 보러 오는 관객들이 열쇠가 되어준다면 어떨까? 그렇게 어느 순간, 다른 긴 모험을 떠난 두 작가의 예술은 ‘무지개 너머 어딘가’의 한 곳에서 만날 수도 있을지 모른다.
/ 최대진
[1] 영화 <오즈의 마법사(The Wizard of Oz)>
[2] 영화 <증오(La Haine)> , 마티유 카소비츠
[3] 데이빗 린치의 2001년 영화